우려가 현실로 “정부 예산 벌써 0원?”…”아들딸 짐 되긴 싫은데” 노년층 ‘발동동’

실버론, 반년 만에 예산 소진…신청 마감 사태
고물가·전세난 속 노년층 ‘급전 창구’로 몰려
정부, 추가 예산 검토…제도 개선 목소리도

전세 재계약을 앞둔 70대 A씨는 지난주 국민연금공단의 ‘실버론’ 신청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허탈한 메시지를 마주했다.

“신청 접수가 마감되었습니다.” 올 상반기에만 5천 건 넘는 신청이 몰린 실버론이 결국 예산 조기 소진으로 문을 닫은 것이다.

공단이 편성한 380억 원의 한도는 반년을 채 버티지 못했다. 눈에 띄는 수요 증가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실버론을 둘러싼 이번 사태는 노년층의 위태로운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전세금도, 병원비도…실버론 없인 버티기 힘든 시대

가장 큰 이유는 단연 ‘금리’다. 실버론의 3분기 이자율은 연 2.51%로, 시중은행의 평균 대출 금리보다 한참 낮다. 카드론이나 대부업체에선 상상할 수 없는 수치다.

특히 연금 외에 고정수입이 없는 노인들에게 실버론은 ‘급전이 필요할 때 마지막으로 붙잡는 밧줄’ 같은 존재다.

병원비, 장례비, 전세금 등 예고 없이 터지는 지출 앞에서 그 어떤 금융상품보다 빠르고 저렴하게 돈을 빌릴 수 있으니, 수요가 쏠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가 기름을 부었다. 생필품 가격이 오르고 병원비 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실질소득이 정체된 노년층의 경제적 곤궁은 날로 심해졌다.

전월세 시장도 만만치 않다. 상반기 대출 용도의 절반 이상이 전세 보증금 충당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보증금 인상이나 월세 전환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실버론이었던 셈이다.

제도 자체도 수요를 끌어모은 배경이다. 국민연금 수급자라는 조건만 충족하면, 복잡한 심사 없이 하루 이틀 안에 대출이 실행된다.

서류도 간단하고, 까다로운 절차도 없다. ‘편리함’과 ‘신속함’은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노년층에겐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멈춰선 마지막 버팀목…‘실버론 중단’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

문제는 이렇게 예측 가능한 수요 증가 속에서도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조기 소진 사례가 있었지만, 올해는 역대급으로 빠르다.

정부가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주거비 폭등 등 사회 전반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채 예년 수준의 예산만 편성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편, 국민연금공단은 복지부 등과 추가 예산 확보를 협의 중이다. 추경이나 예비비 투입이 유력하지만, 그사이 긴급 자금이 필요한 노년층은 고금리 대출로 내몰릴 수 있다.

단기적 조치뿐 아니라, 내년도 본예산에서는 보다 현실적 수요를 반영한 대폭적인 증액이 불가피해 보인다.

실버론의 문이 닫힌 지금, 눈앞에 드러난 것은 단지 한 제도의 예산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사회안전망이 버거워하는 노년층의 현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징후다.

예산 확대와 제도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지금의 무심함은 더 큰 위기로 돌아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