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억원 예산 조기 소진
전월세·의료비 급증에 대안 마련 시급
사금융 노출 위험 커져 대책 필요

“아플 때 병원비가 없어서 어쩌라는 거냐”, “당장 전세금 마련해야 하는데 갈 곳이 없다”
노년층의 마지막 보루였던 국민연금 실버론이 예산 소진으로 갑작스럽게 문을 닫으면서 전국의 60세 이상 노인들이 당황하고 있다.
9일 국민연금공단 발표에 따르면 저금리로 긴급자금을 지원하던 ‘노후 긴급자금 대부’ 제도가 예산 부족으로 신규 대출 접수를 중단했다고 밝혔다.
하루 이틀 만에 받던 긴급자금, 이제 막막

2012년 5월 첫 도입된 실버론은 60세 이상 국민연금 수급자들에게 생활 안정을 위한 긴급 자금을 낮은 금리로 지원하는 제도였다. 전월세 보증금, 의료비, 배우자 장제비, 재해 복구비 등의 용도로 연간 연금 수령액의 2배 이내, 최대 1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올해 3분기 기준 연 2.51%의 금리는 시중 금리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최대 5년 원금 균등분할 방식으로 상환하되, 거치 1∼2년을 선택하면 최장 7년 안에 갚으면 되는 조건이어서 노년층에게 큰 호응을 얻어왔다.
특히 신청 후 대부분 하루 이틀 사이에 신속하게 대출이 실행되어 긴급상황에 처한 노인들에게는 생명줄 같은 존재였다. 국민연금공단 관계자는 “예산 조기 소진에 따라 9일 오전 11시를 기해 신규 대출 접수를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보증금 수요 급증이 주요 원인

올해 상반기 실버론 이용 현황을 보면 수요 급증의 배경을 알 수 있다. 5384건의 대출이 실행되어 348억4600만원이 지급됐는데, 이는 연간 예산 380억원의 92%에 달하는 수치다.
용도별로는 전월세 보증금이 2968건으로 전체의 55.1%를 차지했고, 금액으로는 236억6400만원으로 67.9%에 달했다. 의료비 명목으로는 2351건에 105억9700만원이 지급됐다. 배우자 장제비 47건, 재해복구비 18건이 뒤를 이었다.
경기 회복이 더디고 노후 안전망이 취약한 고령층의 생활비 부담이 커진 점이 예산 소진 속도를 앞당긴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부동산 시장 불안정으로 인한 전월세 보증금 수요 급증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사금융 노출 위험 커져

실버론 중단으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고령층의 금융 소외와 사금융 노출 위험이다. 디지털 금융 접근성이 낮고 신용도가 낮아 일반 금융기관 대출이 어려운 노인들이 불법 사금융이나 고금리 대출 등 위험한 대안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금융 전문가들은 “고령층은 금융 리터러시가 낮아 사기나 착취 등 금융범죄에 더 쉽게 노출된다”며 “공적 금융지원 부재가 이 같은 위험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의료비나 주거비 등 필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건강 악화나 주거 불안 등 삶의 질 저하도 우려된다. 이는 결국 사회복지 시스템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 국가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공단은 추가 예산 확보를 위해 복지부 등 관계 당국과 협의 중이라고 밝혔지만, 현재로서는 신규 대출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갑작스러운 생활 위기 상황에서 적절한 금융 지원을 받기 어려워진 노년층을 위한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