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열풍에 전력 수요 급증…GIS 주목
좁은 땅에서 키운 기술, 세계 시장 흔들다
효성 중심으로 K-전력기기 반격 시작

“국토 좁은 게 단점만은 아니었네”, “우리나라가 이렇게 앞서 있었다니 괜히 뿌듯하다.”
요즘 인공지능 열풍이 몰고 온 ‘데이터센터 붐’이 전력 산업의 판을 본격적으로 흔들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그간 비주류로 여겨지던 초고압 차단기 시장이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도심형 전력 인프라의 핵심 장비로 떠오른 ‘GIS(가스절연개폐장치)’가 주목받으면서, 국내 전력기기 업계도 덩달아 훈풍을 맞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력기기 강자, 효성중공업이 자리하고 있다.
48년 내공의 결실…효성중공업, 초고압 차단기로 세계 흔들다

지난달 효성중공업은 미국 대형 전력회사와 사상 최대 규모인 2641억 원의 GIS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단일 초고압 차단기 수주로는 자사 역사상 최고액이다.
특히나 이번 계약은 규모 이상의 상징성을 지닌다. 1977년 한국 최초로 차단기 생산에 나섰던 효성중공업이 마침내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력의 정점을 입증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사실 오래전부터 GIS 개발과 생산에 집중해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토가 좁기 때문이다.
AIS(공기절연개폐장치)는 구조상 넓은 설치 면적이 필요하지만, GIS는 SF6 가스를 활용한 밀폐형 설계 덕분에 면적이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다.

충전부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아 염분이나 먼지, 감전 위험에도 강하다. 좁은 땅덩어리에 전력 설비를 ‘콤팩트하게’ 밀어 넣어야 했던 한국에게 GIS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기술이었다.
효성중공업은 이 한계를 기회로 삼았다. 1990년대엔 세계 최초·최고 수준의 초고압 GIS 기술들을 연달아 개발했고, 이후 국제 공인 인증기관의 테스트를 거쳐 신뢰도까지 확보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변압기+차단기’ 패키지로 세계 공략…K-전력기기의 반격
현재 효성의 초고압 차단기는 40여 개국에 수출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북미·유럽·중동 등 전력 인프라 확대가 빠르게 진행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변압기+차단기 패키지 수출 전략’까지 전개 중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성과가 효성중공업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HD현대일렉트릭과 LS일렉트릭도 GIS를 비롯한 전력기기 분야에서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며 나란히 글로벌 시장을 확장해가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GIS 중심 설계를 고도화해온 덕분에, 지금의 글로벌 수요 증가가 곧바로 실적 개선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AI와 전력 인프라의 맞물림 속에, 그동안 ‘작지만 강한 기술’을 갈고닦아온 한국 전력기기 산업이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지금의 성장세가 일시적인 흐름에 머물지 않으려면, 기술과 시장 모두에서 꾸준한 발전이 이어져야 한다. 전력이 미래 산업의 핵심 자원으로 떠오른 지금, 그 흐름을 이끌어갈 다음 행보에 기대가 모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