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성 중 최초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던 선구자
가왕 조용필의 후견인이자 홍상수 감독의 어머니였던
전옥숙 여사의 삶을 추적하다
이병주의 소설 ‘남로당’에는 전옥희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해방일보 기자인 주인공은 그를 처음 만난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긴 머리칼 속으로 고혹적인 얼굴이 깎아놓은 조각처럼 빛났다. 큰 눈 속 흑진주를 닮은 눈동자의 광채가 신비스러운 여울로 되었다.”
이 소설 속의 전옥희는 실존인물 전옥숙 여사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전 여사는 국내 여성으로서 최초로 영화 제작에 뛰어든 인물이었으며, 이후 출판계와 방송계 등에서 활약하며 대중 문화계의 전설이 되었다.
존 레논의 아내 오노 요코처럼 수많은 예술가들의 뮤즈가 되었던 그는 영화 감독 홍상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본 기사에서는 술자리에 김영삼 대통령을 부를 정도의 인맥을 자랑했던 문화계 대모 전옥숙의 일생을 추적해보았다.
국내 영화 제작자 중 최초의 여성이었던 전옥숙
전옥숙은 1929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국문학과에 진학한 그는 연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험난한 시대상 속에서 그의 삶도 처음에는 순탄히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있었던 그는 패퇴하는 북한군의 대열에 휩쓸리게 되었다.
이때 만난 헌병대장이 전 여사를 배려해주었던 덕분에 그는 별다른 화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 전 여사는 그 헌병대장과 결혼하였고, 그와 함께 영화사를 설립해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전 여사는 영화 전문지인 ‘주간 영화’를 창간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계의 낙후된 제작 여건을 지켜보면서 그는 영화 제작의 터전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이것이 그가 남편 홍의선과 함께 영화사를 설립한 계기가 되었다.
국내 영화 제작의 요람이 되어준 답십리 촬영소
그가 설립한 ‘답십리 촬영소’에는 녹음실과 현상실 등이 마련되어 있어 영화 제작에 필요한 과정 전반을 해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직원의 복지를 위한 식당과 커피숍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답십리 촬영소에서는 전기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어 조명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드문 환경이었다. 또한 배우들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연습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답십리 촬영소에서 처음으로 제작한 영화는 ‘부부 전쟁’이었다. 해당 영화는 실제 부부 사이였던 김진규와 김보애가 출연해 화제를 불러 모았으며, 평단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답십리 촬영소에서 전 여사의 손을 거쳐 제작된 영화는 정진우 감독의 ‘밀회’, 김달웅 감독의 ‘이수일과 심순애’ 등 무려 80여 편에 달한다.
특히 소록도에서 나병 환자인 남편을 극진히 돌봐 병을 완치시킨 부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그대 옆에 가련다’는 주요 스태프가 모두 여성이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만희 감독과의 인연, 그리고 영화 제작자로서의 ‘자존심’
전 여사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의 걸출한 작품을 만들어낸 이만희 감독과 함께 많은 영화를 제작했다. 당시 이만희 감독은 어떤 장르든 평균 이상의 결과물을 내는 ‘영화계 신의 손’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만희 감독과 전 여사가 함께 만든 영화 중 ‘휴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검열에 부딪혀 개봉하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검열 당국에서는 영화의 결말을 ‘건전하게’ 수정하면 상영 허가를 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전 여사는 “작품이 망가진 채로 극장에 걸리느니 차라리 개봉을 포기하겠다”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로 인해 답십리 촬영소는 당좌 거래 정지를 당하는 등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잊혔던 이 영화는 2005년이 되어서야 공개되었다. 검열 없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휴일’은 이만희 감독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뒤늦게 화제를 모았다.
일본인과 폭탄주를 마시며 일본을 비판하던 당찬 여인
답십리 촬영소는 1970년대에 들어 철거되었지만, 전 여사의 활동은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영화사를 정리한 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출판과 방송 분야로까지 진출했다.
전 여사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한국의 문학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하는 ‘한일 문예’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 얻은 인맥을 바탕으로 일본 후지TV의 한국 지사장을 역임하면서 방송계와도 착실히 연을 쌓아나갔다. 한국에 특파되는 일본의 언론인 중 상당수는 전 여사와 폭탄주를 마시며 ‘친한파’가 되기도 했다.
전 여사는 술을 마시면서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여러 모로 비판했고, 이는 큰 논쟁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결국 전 여사의 카리스마에 눌려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 일본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가왕’ 조용필이 어머니라고 불렀던 사람
문화계 전반에 걸친 엄청난 인맥으로 ‘사교계의 여왕’이라고도 불렸던 그는 가수 조용필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전 여사가 조용필의 노래를 작사해주기도 할 만큼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였고, 조용필은 전 여사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극진히 모셨다. 전 여사의 차녀가 생일을 맞이하자 조용필이 기타를 치며 직접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전 여사가 과거 조용필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업계에서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조용필이 일본에 진출하여 활동할 때에도 전 여사의 인맥이 적잖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허물 없이 지냈던 ‘슈퍼 인싸’
전 여사의 넓은 인맥을 실감하게 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 여사가 하루는 이태원의 술집에서 권오기 동아일보 사장, 남재희 장관, 아사히신문 특파원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하자 전 여사는 “지금 김영삼 씨를 불러도 되냐”는 말로 동석한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통일민주당의 총재를 맡고 있었던 거물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 여사의 부름을 받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실제로 그 자리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대해 남재희 전 장관은 “YS가 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전 여사가 YS와 그렇게 허물 없이 통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고 회상했다.
전 여사가 매년 개최했던 송년 파티도 유명하다. 해당 파티에는 당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참석하곤 했다. 시인 김지하, 재야운동의 대부 장일순,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전 여사를 보러 왔다.
남재희 전 장관은 “한 번은 좀 일찍 가 있었더니 김근태 의원이 나타났다. 그래서 ‘대권 후보감이 왔군’ 하고 생각했다. 좀 있으니 손학규 의원이 왔다. 그래서 ‘두 번째 대권 후보감이 왔군’ 하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남재희 전 장관의 증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또 조금 있으니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까지 나타났다. 그래서 ‘세 번째 거물이 왔군’ 하고 생각했다. 그 파티는 늘 그런 식이었다”고 회상했다.
남성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그 이상의 무언가였던 전옥숙
전 여사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에는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문화인과 지식인이 많았기에 전 여사를 ‘한국의 뮤즈’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뮤즈는 남성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여성을 뜻하는 단어다. 그러나 전 여사의 일생을 보면 단순히 남성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만을 했던 수동적인 삶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국내 여성 중 최초로 영화 제작에 뛰어든 사람이었고, 영화사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으며, 사교계의 여러 인물과 남녀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눴다.
현대사의 격랑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갔던 전옥숙 여사. 그는 2015년 별세하였지만, 그의 아들인 홍상수 감독이 전 여사의 유지를 받들어 더 좋은 작품들을 보여줄 것을 기대해본다.
우리들이 모르던 사실을 뒤늦게 알도록 알려주는 기사~전옥숙여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