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시 원로 시인 신경림 타계
사람 간의 인정과 소통을 강조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시집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등을 쓴 민중 시의 원로인 신경림 시인이 지난 22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7년동안 대장암으로 투병하던 신경림 시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민중 시의 포문을 열어젖히며 민중들의 아픔을 위로했던 신경림 시인의 죽음에 문인들은 큰 슬픔에 빠졌다.

문인들은 신경림 시인의 작품이 한국 현대 시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 주요 문인 단체들과 함께 대한민국 문인장을 치를 계획이라고 밝혔다.
민중 시의 대가, 시인 신경림
1935년 태어난 신경림 시인은 고등학생 때부터 시인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에게 시를 칭찬받은 이후, 시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신 시인은 월북 및 납북 문인들의 시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955년 문예지 ‘문학예술’에 신경림 시인의 시가 추천되며 등단했으며, 이른 나이에 등단했음에도 낙향하여 강원도와 충청도를 떠돌았다고 전해진다.
이때 광부, 농부, 장사꾼, 인부 등 직업을 전전하며 민중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였는데, 이 경험이 신경림 시인의 민중 시에 토대가 되어주었다.
1973년 간행한 시집 ‘농무’는 농민으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으며, 특히 시 ‘농무’에서는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붕괴되어 가는 농민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신명 난 춤사위를 통해 극복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담은 ‘농무’로 신 시인은 만해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후에도 시 세계를 확장해 나가며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다루었으며, 1998년 출간된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를 통해 다시금 도시 빈민층의 고달픈 삶을 조명했다.
이처럼 민중의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아픔을 어루만진 민중 시인 신경림.
말년까지 창작 의지를 보였으나 건강이 악화하며 끝내는 별이 된 시인 신경림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슬픔을 표하고 있다.
인정과 소통을 중요시 여긴 한국 문단의 거목

한편 신경림 시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과거 그가 자전 에세이를 통해 밝힌 일화가 함께 재조명되고 있다.
신경림 시인의 자전 에세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따르면, 초등학교 시절 신 시인은 초등학생 문예 작품 전시회에 시를 출품했고, 당연히 자신이 당선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선자로 불린 것은 다른 아이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주정뱅이이자 신 시인 집안의 산지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신 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다시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신경림 시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대신 당선자가 된 아이에 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아이가 남몰래 소년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 시인은 그 아이를 끝내 존경하게 되었다고.
자신이 잘 몰랐던 상대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존경하게 된 어린 시절의 일화는 곧 신경림 시인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2016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 재미있다”며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발전을 못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세상의 변화는 인정할 건 인정하고, 지적하는 잘못을 성찰하는 데서 이뤄진다”며 인정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네티즌들은 “교과서에서 시를 본 게 어제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등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