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 선박 계약, 전쟁 여파로 결국 파기
삼성, 선수금 반환 거부하고 맞소송 돌입
정치가 계약 흔드는 시대…리스크 재조명

러시아에서 불어온 바람이 결국 5조 원짜리 조선 계약을 뒤엎었다.
삼성중공업이 러시아 즈베즈다 조선소와 맺었던 대규모 선박 기자재 공급 계약을 공식 해지하며, 억 단위의 손해배상 소송에 돌입한 것이다.
양측의 계약 파기는 상거래를 둘러싼 흔한 갈등이라기보다는, 국제 정세가 불러온 복잡한 법적·경제적 분쟁의 서막처럼 보인다.
5조 원 선박 계약, 전쟁 한방에 뒤집혔다
시작은 순조롭고 기대감도 높았다. 삼성중공업은 2020년과 2021년 즈베즈다 조선소와 쇄빙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10척, 셔틀탱커 7척에 대한 선박 기자재 및 블록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총 4조8천억 원이 넘는 초대형 수주였다. 하지만 전쟁은 계약서 위에 싸늘한 그늘을 드리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즈베즈다 조선소는 미국 등 서방의 제재 리스트에 올랐고, 선박 건조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지난해 즈베즈다 측이 먼저 계약 해지를 통보하며, 삼성에 이미 지급한 선수금 약 1조1천억 원과 이자까지 돌려달라고 요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성중공업은 이 상황을 ‘일방적 파기’로 규정했다. 계약 해지를 인정할 수 없다며, 작년 7월 싱가포르 중재법원에 분쟁 조정을 신청했다.
동시에 협상 테이블도 유지했지만, 전쟁의 불씨는 식지 않았고 사업의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결국 삼성은 지난 18일, 자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계약을 공식적으로 종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발표했다. 선수금 반환도 보류한 채, 오히려 그보다 더 큰 손실을 메우기 위한 법적 대응에 나선 것이다.
돈보다 무서운 건 신뢰…전쟁이 바꾼 계약의 룰
재미있는 건 이 와중에도 삼성중공업이 “우린 끄떡없다”는 입장을 내놨다는 점이다.
이번 계약 해지로 일부 수주잔고는 줄어들겠지만, 3월 말 기준 여전히 약 37조 원의 수주잔고를 확보하고 있어 당장 매출에 큰 타격은 없다는 설명이다.
한두 건의 악재에 흔들릴 만큼 얕은 수주 구조는 아니라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는 돈보다 신뢰다. 러시아 측의 선불금 회수 요구와 삼성의 손해배상 청구가 맞물리며, 향후 국제 중재 결과에 따라 파장이 커질 수 있다.
‘계약’이 더는 상호 합의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시대, 정치와 전쟁은 상거래의 변수이자 리스크가 되어가고 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계약 해제를 넘어선다. 글로벌 기업들이 지정학적 리스크를 어떻게 감내하고, 어떤 전략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더 늦기 전에, 기업들도 정부도 외교적 분쟁이 현실이 된 시대에 걸맞은 리스크 관리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지금의 안일한 대처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아이고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