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일본 정부가 국가 석유 비축유 2차 방출을 시작하며 연말까지 원유 공급에 문제가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때마침 전국 평균 주유소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천 원을 가볍게 돌파한 한국의 팍팍한 현실과 맞물리면서, 일각에서는 비축유도 안 풀고 고유가 방어에 실패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중의 흔한 오해와 달리 한국이 보유한 비축유의 양은 절대 적은 수준이 아니다.
한국석유공사와 업계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국 9개 기지에 보관된 정부 비축유만 약 1억 배럴이며, 민간 의무 비축량까지 합치면 무려 1억 9천만 배럴에 달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 중 5번째로 큰 압도적인 비축 인프라를 갖춘 셈이다.
1.9억 배럴 안 푸는 속사정

창고에 기름이 가득한데도 일본처럼 시원하게 풀어 체감 가격을 낮추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한국은 1차 에너지 수입 구조상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중동 원유 의존도가 무려 70%에 육박한다. 중동 바닷길이 막히면 일본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구조다.
더 큰 문제는 어마어마한 기름 먹는 하마인 국내 산업 구조다.
석유화학과 정유 산업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한국은 하루에만 약 290만 배럴의 원유를 태운다.

1억 9천만 배럴이라는 거대한 재고가 서류상으로는 200일을 버틸 수 있는 양처럼 보이지만, 실제 공장을 풀가동하는 현장 기준으로는 두 달조차 버티기 아슬아슬한 방어막에 불과하다.
결국 정부 입장에서 비축유는 당장의 기름값을 내리기 위한 ‘세일용 카드’가 아니라, 수입길이 완전히 끊겼을 때 국가 산업의 셧다운을 막기 위해 쥐고 있어야 할 ‘최후의 생명줄’인 셈이다.
가격 방어 일본 vs 수급 방어 한국
이러한 구조적 차이는 한일 양국의 유가 방어 성적표를 확연하게 갈라놓았다. 일본은 비축유 방출과 더불어 정유사에 막대한 재정을 직접 보조금으로 투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국 휘발유 평균 가격을 리터당 170엔(약 1,500원대) 수준에 억지로 묶어두는 강력한 ‘가격 방어’ 정책을 펴고 있다. 소비자가 느끼는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한국은 유류세를 법정 최대치까지 내리며 버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국제 유가 폭등분을 100%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대신 한국 정부는 정유사들이 공장 가동을 멈추지 않도록 비축유를 먼저 빌려주고 나중에 대체 원유로 갚게 하는 ‘비축유 스와프’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태 등 중동 위기 속에서도 국내 정유 수급망이 무너지지 않도록 촘촘한 ‘수급 방어’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주유소 전광판에 찍힌 2천 원이라는 숫자는 국민 체감상 명백한 낙제점일 수 있다.
하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당장의 기름값 할인을 포기하더라도 국가 경제의 심장인 정유 공장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지켜내는 고육지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