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재 위험이 없고 주행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려주는 이른바 ‘꿈의 배터리’, 전고체.
하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전고체 상용화는 항상 5년 뒤에나 가능한 신기루 같다”며 짙은 피로감을 호소해 왔다. 연구실 데이터나 시제품(프로토타입) 수준의 발표만 무성할 뿐, 실제 도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양산 단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중국 배터리 업계가 연구실 문을 박차고 나와 실제 ‘생산 라인’을 가동하는 장면을 대대적으로 공개하며, 글로벌 전고체 시장의 여론을 빠르게 선점해 나가고 있다.
연구실 데이터 대신 ‘공장 컨베이어 벨트’를 보여주다
외신에 따르면 중국의 대형 배터리 제조사 EVE에너지(EVE Energy)는 최근 청두에 위치한 생산 라인에서 두 가지 종류의 전고체 배터리를 성공적으로 롤아웃(Roll-out·생산 라인에서 첫 제품이 나옴)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 소식이 한국과 일본의 배터리 업계를 긴장시키는 이유는, EVE에너지가 완벽한 대량 양산 수율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핵심은 ‘보여주기 단계의 진화’에 있다. 그동안은 논문이나 PPT 자료로 기술력을 증명하려 했다면, 이제는 실제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전고체 배터리가 쏟아져 나오는 시각적 증거를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투자자들의 눈앞에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멀었다”던 한국과 일본, 허를 찔린 여론전
이는 전고체 배터리 시장의 ‘진짜 패권’을 쥐고 있다고 평가받는 삼성SDI, LG에너지솔루션, 그리고 일본 토요타의 신중한 행보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삼성SDI는 수원에 전고체 파일럿 라인(S라인)을 구축하고 2027년 상용화를 목표로 수율과 품질을 끌어올리는 ‘내실 다지기’에 한창이다. 전고체 특허 세계 1위인 토요타 역시 2027~2028년을 현실적인 상용화 시점으로 잡고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기업들이 “아직 원가가 너무 비싸고 대량 양산 품질을 담보하기 어렵다”며 완벽주의를 고수하는 사이, 중국 업체들은 “우리는 이미 라인에서 뽑아내고 있다”며 시장의 심리적 주도권을 무섭게 낚아채고 있는 형국이다.
기술력의 팩트보다 무서운 ‘선구자 이미지’의 고착화
B2B 수주전에서 ‘시장의 인식’은 곧 무기다. EVE에너지를 비롯한 중국 배터리 굴기 기업들이 실제 상용화의 경제성(수율, 가격)을 확보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10년 뒤를 내다보고 전기차 플랫폼을 짜야 하는 완성차 업체들 입장에서는, 눈앞에서 생산 라인을 쌩쌩 돌리며 시제품을 납품하는 중국의 속도전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전고체 배터리는 누가 먼저 완벽한 제품을 만드느냐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누가 먼저 ‘전고체 선구자’라는 이미지를 시장에 각인시키느냐의 마케팅 싸움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한국 배터리 업계 역시 압도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제는 시장의 불신을 잠재울 수 있는 가시적인 퍼포먼스와 여론 선점 전략을 병행해야 할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꿈의 배터리를 향한 경쟁이 연구소의 비커를 넘어, 글로벌 시장의 심리를 지배하기 위한 살벌한 여론전으로 번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