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따라 피우시니 담배 줄이라”고
최불암에게 전화한 故 육영수 여사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러브 스토리 재조명
배우 최불암이 드라마 ‘수사반장’을 촬영할 당시 故 육영수 여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던 일을 털어놓아 화제가 되고 있다.
최불암은 1974년 어느 일요일 청와대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집사람이 ‘여보, 청와대 부속실에서 전화가 왔어’ 하더라”며 긴장 속에 전화기를 건네 받았던 기억을 회상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는 별안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최불암은 “나 육영수예요”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육 여사는 최불암에게 “담배를 몇 대 태우세요?”라고 물었다. 최불암이 “넉 대 태웁니다”라고 답하자, 육 여사는 “아이고. 두 대만 태우세요. 대통령께서 드라마를 보시면서 꼭 넉 대를 따라 피우세요”라며 웃었다.
그때 수화기 저편에서 “무슨 쓸데없는 얘길 하고 그래. 끊어 그만”이라고 가볍게 핀잔을 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목소리도 작게 들려왔다고 한다.
최불암은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잊히지 않는 사건”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육영수 여사,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어떻게 만났나?
최불암이 육영수 여사와의 일화를 언급함에 따라 육 여사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육 여사는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의 소개로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때 박정희는 이미 결혼하여 딸까지 낳은 상태였다.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대로 1936년에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박정희는 좀 더 나이를 먹은 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길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인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 아들이 결혼하는 걸 봐야겠다”고 강권하여 당시 16세였던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시켰다.
애당초 본인이 원했던 상대와 결혼한 것도 아니었으니, 박정희는 김호남에게 그리 정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서게 되었다.
김호남과 갈라선 후 박정희 휘하의 장교 중 하나였던 송재천이 육 여사를 박정희에게 소개해 주었다.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였던 육 여사에게 박정희는 단숨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두 사람은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33세, 육 여사의 나이는 25세였다. 그런데 육 여사의 아버지인 육종관은 두 사람의 결혼을 크게 반대했다.
육종관은 “이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 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육 여사를 꾸짖었다.
당시는 낙동강 방어선이 뚫려 적화통일이 달성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당연했다. 정말로 적화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국군인 박정희는 제거 대상 1호가 되기 때문이다.
딸을 과부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육종관은 육 여사와 박정희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고, 결혼한 뒤에도 박정희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신식 교육을 받은 딸이 자식도 있고 첫 아내와 이혼까지 한 8살 연상의 남자와 결혼하려 한다는 것도 육종관을 분노하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그러나 육 여사의 어머니 이경령은 육 여사와 박정희의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경령이 육 여사의 사주를 무속인들에게 보였을 때, 다들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 가야 잘 산다”고 풀이했기 때문이라는 일설도 있다.
육종관이 육 여사와 박정희의 결혼을 반대했던 또다른 이유로 그가 “박정희와 결혼하면 육영수가 비명횡사한다”는 예언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버지가 반대한 결혼을 결국 성사시킨 육영수 여사
결혼 후 육 여사와 박정희는 노량진에 신혼 살림을 차렸다.
군인 남편이 워낙 박봉이다 보니 잠시 구멍가게를 운영한 시기도 있었다. 부잣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신여성 아가씨가 사랑만으로 스스로 어렵게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식구가 늘어 6년 만에 신당동으로 이사한 두 사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은 육 여사가 대문이 작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박정희를 보았다. 그걸 본 육 여사는 곧바로 대문을 고쳤다고 한다.
이때 육 여사가 “남자가 고개를 숙이면 기개가 꺾인다”고 말했다고도 하고, “이 집에 오시는 분은 모두 귀하신 분들인데, 어떻게 들어오실 때부터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이야기했다고도 한다.
박정희가 집권한 후로도 육 여사는 퍼스트 레이디로서 내조에 힘썼다. 당시 장기 집권을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던 박정희 정부에 대한 여론을 조금이나마 부드럽게 해준 사람이 바로 육 여사였다.
또 박정희의 정치적 감각에는 육 여사의 조언이 영향을 줬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총격으로 육 여사를 잃은 박정희는 국민장에서 영구차를 떠나보낸 직후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에는 박정희가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육 여사에게 무척이나 의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해당 책에 따르면 박정희는 부인이 사망한 후 마음이 약해져 극도로 힘들어했다고 한다.
최불암의 육 여사 관련 일화와 과거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의 만남 이야기를 접한 누리꾼들은 “육영수 여사에게서 전화가 오다니 신기하다”, “육 여사가 박 전 대통령을 많이 생각하셨나 보다”, “나라도 육영수 여사한테서 전화 받으면 평생 못 잊을 듯” 등의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