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성 맹장염으로 쓰러진 언니를 업고 응급실에 뛰어가서 밤새 간호했는데, 정작 수술 동의서엔 사인을 못 한답니다. 법적인 가족이 아니라서요. 결국 10년째 연락 한 번 안 하던 언니의 오빠가 다른 지역에서 올 때까지 피 마르며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7년째 한집에서 살고 있는 비혼 여성 김모(42)씨와 이모(40)씨는 최근 겪은 응급실의 악몽을 떠올리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경제 공동체를 이루고 누구보다 서로를 돌보고 있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들은 철저한 ‘남남’에 불과했다.
현실은 60만 ‘대안 가족’ 시대, 제도는 1970년대
혈연이나 혼인 관계로 묶이지 않았지만 실질적인 가족의 역할을 수행하는 ‘법망 밖 가족’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가족이 아닌 남남끼리 사는 5인 이하의 가구를 뜻하는 비친족 가구는 2020년 42만 3,459가구에서 2024년 58만 413가구로 불과 4년 만에 16만 가구가량 껑충 뛰었다.
동성 부부, 연인 간 동거, 마음 맞는 친구와의 룸메이트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자발적 비혼 출산 등 혼인 외 출산 비율 역시 2020년 2.5%에서 2024년 5.8%로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사회의 풍경은 이토록 급격히 변하고 있지만, 국가의 제도는 여전히 혼인 신고서와 가족관계증명서라는 과거의 ‘정상 가족’ 프레임에 꽉 막혀 있다.
법적인 가족은 배우자나 혈족이 응급 상황에 처했을 때 수술 동의를 할 수 있고,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얻어 의료비 부담을 줄이며, 사망 시 당연히 상속과 장례 주관의 권리를 가진다.

반면 비친족 가구는 10년을 넘게 헌신하며 동거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권리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동거인이 아파도 병가나 돌봄 휴가를 낼 수 없고, 세액 공제나 신혼부부 주거 지원 같은 혜택은 꿈도 꿀 수 없는 구조적 차별에 갇혀 있는 것이다.
꽉 막힌 한국, 가족의 개념 넓힌 해외 선진국들
전문가들은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묵살하는 현행 제도를 방치할 경우, 저출산·고령화 기조 속에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돌봄망’ 자체가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1인 가구가 폭증하는 시대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결합해 서로를 돌보겠다는데, 국가가 낡은 법의 잣대를 들이밀며 이들의 결속을 가로막고 각자도생과 고독사라는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해외 선진국들은 이미 가족의 개념을 유연하게 확장하며 해답을 찾고 있다. 프랑스는 시민연대협약(PACS·팍스) 제도를 통해 성별과 무관하게 동거인에게 결혼에 준하는 세제 혜택과 건강보험 권리를 보장한다.

네덜란드의 등록 파트너십 제도는 혼인과 사실상 동일한 효력을 발휘하며, 스웨덴은 부모의 동거인에게까지 육아휴직 권리를 부여하며 다양한 형태의 양육과 돌봄을 국가가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혈연이나 혼인이 아닌 동거인도 가족에 준하는 관계로 인정하자는 ‘생활동반자법’과 비혼 여성의 보조생식술을 지원하는 ‘독립출산지원법’이 연이어 국회에 발의됐다.
그러나 종교계 일각의 동성혼 합법화 우려와 보수적인 정치 논리에 부딪혀 입법 논의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60만 가구가 넘는 이들이 이미 우리 사회의 큰 축을 지탱하고 있는 만큼, 눈을 가린 채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변화한 삶의 방식에 발맞춘 전향적인 제도 정비가 시급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