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동 정세의 극심한 불안으로 인해 이른바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납사) 수급에 치명적인 제동이 걸렸다.
단순한 대기업의 원료 부족을 넘어, 폴리에틸렌(PE) 등 파생 원료를 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중소 플라스틱 가공업체들까지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하는 연쇄 위기로 번지고 있다.
실제로 경기 안산시에 위치한 플라스틱 필름 제조 공장들은 폴리에틸렌이 가득 차 있어야 할 원료 창고가 듬성듬성 비어있는 등 심각한 조업 차질을 빚고 있다.
이처럼 중동발 공급망 쇼크가 국내 산업 생태계의 밑단까지 타격을 입히는 가운데, 국내 민간 기업이 정부와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대체 수급선을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LG화학의 긴급 수혈, “3일 치 물량도 아쉽다”

30일 산업통상자원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LG화학이 천신만고 끝에 확보한 러시아산 나프타 2만 7,000톤이 이날 국내에 도착했다.
해당 물량은 곧바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심장부 중 하나인 충남 대산석유화학단지로 투입돼 멈춰가는 공장의 숨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물론 이번에 들여온 물량은 국내 월평균 나프타 사용량(약 400만 톤)과 비교하면 약 3~4일가량밖에 사용할 수 없는 제한적인 규모다.
하지만 나프타 수급 불안이 극에 달한 현 상황에서는, 경제성과 물류 여건을 따져가며 단 며칠 치의 공장 가동 물량이라도 확보해 낸 것 자체가 민관 협력의 값진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제재 벽 넘은 ‘루블화 결제’ 막전막후

사실 그동안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값싼 러시아산 나프타의 존재를 알면서도 선뜻 도입에 나서지 못했다. 미국의 엄격한 수출 통제 탓에 자칫 금융 결제 과정에서 ‘세컨더리 보이콧(2차 제재)’을 맞아 기업 전체가 글로벌 시장에서 퇴출당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최근 한 달간 러시아산 석유제품에 대한 제재를 한시적으로 완화하면서 도입의 틈새가 열렸다. 산업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국 재무부의 파트너인 재정경제부를 통해 치열한 물밑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미국 재무부로부터 “달러화가 아닌 루블화 등으로 결제할 경우 문제가 없으며, 이에 따른 2차 제재도 부과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유권 해석을 받아냈다.
정부의 확실한 외교적 보증이 뒷받침되면서 LG화학을 비롯한 국내 기업들이 안심하고 러시아산 원료를 들여올 수 있는 활로가 열린 셈이다.
중동산 의존도 77%…4월 11일 다가오는 시한폭탄

이번 러시아산 나프타 긴급 수입으로 당장의 급한 불은 껐지만, 근본적인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한국은 전체 나프타 수요의 약 4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중 중동산 수입 비중이 무려 77%에 달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만약 이스라엘-이란 갈등 등으로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핵심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될 경우,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은 그야말로 직격탄을 피할 수 없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번 러시아산 도입을 가능케 했던 미국의 제재 완화 조치가 당장 다가오는 4월 11일까지만 유효하다는 점이다.
산업부 관계자 역시 “미국의 조치가 4월 11일로 예정돼 있어, 그 이후에도 수급이 지속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결국 한시적인 제재 완화 기한이 끝나기 전에, 석유화학 업계 전체가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장기적인 공급망 리스크를 헷지(Hedge)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