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을 떠나는 백만장자가 2,400명이나 된다고?”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3일 발표한 자산가 해외이주 통계를 둘러싸고 정부와 재계가 정면충돌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가짜 뉴스”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고, 임광현 국세청장은 8일 페이스북을 통해 “실제로는 연평균 139명에 불과하다”며 구체적 수치로 반박에 나섰다.
논란의 발단은 대한상의가 영국 이민 컨설팅 업체 헨리&파트너스의 보고서를 인용해 “2025년 한국의 자산 100만달러(약 14억원) 이상 고액자산가 순유출이 세계 4위인 2,400명으로 급증했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이 대통령은 7일 X(옛 트위터)에 “법률에 의한 공식 단체인 대한상의가 이런 짓을 공개적으로 벌이다니 믿어지지 않는다”며 강하게 질타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대한상의는 같은 날 “외부 통계를 충분한 검증 없이 인용해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했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구윤철 부총리와 김정관 산업부 장관까지 가세해 “대한상의 감사에 돌입하겠다”는 등 연쇄 질타가 이어지면서 논쟁은 더욱 커졌다.
국세청 데이터 vs 민간 리서치,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임 청장이 제시한 공식 통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한국인의 해외이주 신고 인원은 연평균 2,904명이며, 이중 자산 10억원 이상 고액자산가는 139명에 그쳤다. 특히 상속세가 없는 국가로 이주한 비율은 전체 39%인 반면, 10억원 이상 자산가는 25%로 오히려 낮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0억~50억원 구간에서는 112명 중 27명(24%)이, 50억~100억원 구간에서는 13명 중 3명이 상속세 없는 국가로 이주했다. 임 청장은 이를 근거로 “상속세 회피가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은 왜곡”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국세청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그림도 보인다. 고액자산가의 순유출 규모는 2022년 102명에서 2024년 175명으로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 숫자는 대한상의 주장보다 훨씬 적지만, 증가 추세 자체는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상속세만이 아니다”… 복합적 세부담이 실제 원인

세무 전문가들은 해외이주 결정이 상속세 단일 요인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고 분석한다. 싱가포르로 이주한 한 투자회사 대표는 “한국은 상속세뿐 아니라 소득세 등 살아 있을 때 내는 세 부담도 세계적으로 높기 때문에 이민을 고민하는 자산가가 많은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대주주 할증(20%)을 포함하면 60% 수준으로, OECD 회원국 중 일본(55%) 다음으로 높다.
2024년 상속세 수입은 9조 6,000억원에 달하며, 총세수 대비 비중도 2002년 0.29%에서 2024년 2.14%로 급증했다. 과세 인원 역시 2002년 1,661명에서 2024년 21,193명으로 13배 증가했다.
재정 전문가들은 “미국의 경우 2025년 기준 부부 합산 약 410억원까지 상속·증여세를 면제하는 등, 상속세가 낮은 국가로 이주하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설명한다. 상속세가 완전히 없는 국가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은 국가로의 이동까지 포함하면 체감 이주 규모는 더 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숫자 논쟁 너머, 제도 개편 논의 재점화

이번 논쟁은 26년간 근본적 변화 없이 유지되어 온 상속세 제도에 대한 재검토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대한상의는 연부연납 기간을 현행 10년에서 20년으로 확대하고, 상장주식 현물납부를 허용하는 등의 개선안을 제시한 바 있다.
정부도 2026년부터 자녀 1인당 공제액을 기존 5,000만원에서 5억원 수준으로 파격 상향하는 개편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
무 전문가들은 “세율 인하가 정치적으로 어렵다면, 납부 방식의 유연화가 현실적 대안”이라며 “유산세에서 유산취득세로의 전환 등 과세 체계 개편도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통계 수치를 둘러싼 공방과 별개로, 높은 세부담이 자산가들의 해외이주를 촉진하는 요인 중 하나라는 점에는 이견이 적다. 대한상의의 검증 소홀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번 논쟁이 상속세 제도의 합리적 개선을 위한 사회적 논의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