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가항력, 말 그대로 전쟁·자연재해처럼 당사자의 통제 밖에 있는 사유로 계약을 이행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한국 경제 전반에 걸쳐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원인은 중동발 전쟁 여파로 석유화학 핵심 원료인 나프타(납사) 가격이 한 달도 안 돼 93% 폭등된 것이 발단이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에틸렌 원료 재고가 불과 2주 수준에 그치면서, 이르면 이달 말부터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문제는 에틸렌이 플라스틱·합성수지·합성고무 등 사실상 모든 화학제품의 뿌리 원료라는 점이다. 석유화학 한 곳의 공급 불안이 자동차·조선·건설·가전 등 전방 산업 전체를 흔드는 ‘연쇄 충격’으로 번지고 있다.

나프타 93% 폭등…’불가항력’ 도미노 시작됐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나프타 거래 가격은 이란 사태 발발 직전인 지난달 27일 t당 633달러에서 지난 20일 1,141달러로 약 93% 급등했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나프타 수입량이 국내 전체 수입의 약 60%를 차지하는 구조에서, 중동 지역 정세 불안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일부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이미 특정 제품에 대해 ‘공급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하거나 가능성을 사전 통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LG화학은 연간 에틸렌 생산능력 80만 톤 규모의 전남 여수 2공장 가동 중단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현재 가동률이 80% 수준에서 60~70%대로 추가 하락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는 “나프타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스팟 물량 확보 자체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車부터 조선·건설·가전까지…전방 산업 도미노 충격
에틸렌 공급 차질의 파장은 전방 산업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웨더스트립, 범퍼 구조물, 대시보드, 도어 트림, 시트 커버 등 내외장재 대부분에 에틸렌 기반 폴리머가 사용된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수급 불안이 한 달 이상 길어질 경우 전반적인 생산 계획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조선업계의 경우 철판 가공·절단 공정에 에틸렌을 활용하는데, 지난주 기준 재고가 이르면 1주 내 소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부가 지난 15일 화학협회와 조선협회 간 화상 협의를 주선해 단기 긴급 물량을 확보하면서 즉각적인 위기는 모면했다.
건설업계는 배관·창호(PVC)와 단열재(스티로폼) 등 주요 자재에 석유화학 원료를 대거 사용한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상반기까지는 조달에 문제가 없지만, 현 상황이 하반기까지 이어지면 수급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했다. 가전업계 역시 냉장고·세탁기·에어컨 외장에 쓰이는 ABS·폴리프로필렌(PP) 소재 단가 상승과 납기 지연을 우려하고 있다.
요소수 대란 재현 가능성은 낮아…비료 수급·물가는 변수

일각에서 제기되는 ‘제2의 요소수 대란’ 우려에 대해서는 정부와 업계 모두 재현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차량용 요소의 중동산 수입 비중이 약 5%에 불과하고, 현재 국내 요소수 재고도 약 100일치 수준이기 때문이다.
다만 비료용 요소는 별개의 문제다. 비료용 요소의 중동산 수입 비중은 40%를 웃도는 데다, 국제 가격도 최근 한 달 새 약 50% 상승했다.
현재 국내 비료 재고는 5월, 원자재는 6월까지 사용 가능한 수준으로, 이후 수급 불안이 농산물 가격 상승을 통해 전반적인 물가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는 나프타를 경제안보품목으로 지정하고 1조 5,000억 원 규모의 금융지원 패키지를 가동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이번 사태를 단순한 원자재 수급 문제가 아닌 국가 기간산업과 공급망 안정의 문제로 봐야 한다”며 “소비 절감과 공급망 대응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