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가의 3열 대형 전기 SUV는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자동차 업계의 편견이 보기 좋게 깨졌다.
최소 7,000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기아의 플래그십 전기차 EV9이 미국 시장에서 세 자릿수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며 상품성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려한 해외 실적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사뭇 다르다. 정작 안방인 한국 시장에서는 철저한 외면을 받으며 극단적인 성적표의 엇갈림을 보여주고 있다.
비싼 전기차라도 가치를 인정하는 해외 시장의 특성과, 가격 대비 효용을 엄격하게 따지는 국내 소비자들의 온도 차이가 하나의 모델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전년 대비 481.5% 뛴 미국 실적

기아 EV9은 최근 미국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판매에 속도를 내며 상승 기류를 타고 있다.
현대차·기아의 지난 2026년 4월 미국 판매 실적에 따르면, EV9은 한 달 동안 1,349대가 팔려나갔다.
이는 전년 동월과 비교해 무려 481.5%나 수직 상승한 수치로, 대형 전기 SUV에 대한 현지 소비자들의 탄탄한 수요를 증명한 셈이다.
광활한 대륙 특성상 3열 공간이 확보된 대형 SUV의 선호도가 원래 높기도 하지만, 전기차 특유의 강력한 토크와 부드러운 승차감이 겹치면서 ‘비싼 차라도 상품성만 좋으면 팔린다’는 명제를 입증했다.
미국 대비 4분의 1도 안 팔린 안방

반면 한국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EV9의 성적표는 기아의 플래그십이라는 상징성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다.
같은 4월 기준 한국에서 EV9의 판매량은 단 351대에 그쳤다. 똑같은 차종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시장에서 한국보다 약 3.8배나 더 많은 차가 팔려나간 것이다.
국내 모델별 전체 판매 순위에서도 EV9은 점유율 0.2%를 기록하며 71위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실제로 같은 달 국내에서 패밀리카 수요를 싹쓸이한 쏘렌토가 1만 870대 팔린 것과 비교하면, EV9의 판매량은 쏘렌토의 약 31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심지어 대중화 전기차를 표방하며 8,674대가 팔린 동생 격인 EV3는 물론, 2,510대가 팔린 EV6와 비교해도 판매 존재감이 극도로 미미하다.
엇갈린 성적표의 결정적 차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갈린 EV9의 운명은 각 시장이 처한 경제 상황과 소비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차고를 보유한 단독주택 거주 비율이 높아 전기차 홈 충전이 매우 수월하며, 차량 구매 시 예산의 상한선이 상대적으로 높게 형성되어 있다.
반면 한국 시장은 지속적인 고금리와 전기차 보조금 축소, 그리고 아파트 중심의 충전 인프라 한계가 겹치면서 고가의 프리미엄 전기차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태다.

결국 대형 전기 SUV를 구매하려는 국내 소비자들은 7,000만 원대 이상의 막대한 초기 비용 앞에서 지갑을 닫고, 오히려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탑재한 쏘렌토나 싼타페 등 현실적인 내연기관 대체재로 빠르게 선회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