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구한 건 맥아더가 아니었다?” …75년 전 ‘숨겨진 영웅’, 후손들 이야기 들어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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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커 장군 후손, 전쟁기념관 방문
  • 낙동강 방어선 사수로 전세 반전 기여
  • 교통사고로 안타까운 최후 맞아

미8군 사령관으로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기여한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의 후손이 한국을 방문했다.

  •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서 활약했다.
  • 그의 손자 샘 워커 2세는 한국의 발전을 자랑스러워했다.
  •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 사수로 인천 상륙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 그는 교통사고로 전쟁 도중 사망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큰 공헌을 세운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의 후손들이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명장이었던 조지 패튼의 신임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번 방문에는 손자 샘 워커 2세 부부와 3대가 함께 했고, 전쟁 전시실을 관람하며 조부의 공헌을 기렸다.

  • 워커 장군의 대표적인 공로는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여 인천 상륙 작전의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 그는 ‘버티지 못하면 죽음’이라는 구호로 방어선 사수 의지를 드러냈다.
  • 워커 장군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사후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 아들 샘 워커는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기여하여 대장으로 진급했다.
전쟁기념관 방문한 워커 장군 후손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미군 명장
불의의 사고로 전쟁 도중 목숨 잃어
워커 장군
맥아더와 워커 / 출처 : 연합뉴스

6.25 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큰 공훈을 세웠던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의 후손이 지난 15일 한국의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대표적인 명장이었던 조지 패튼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았던 장군이며 한국에선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북한군 저지에 목숨을 바쳤던 군인이다.

잊지 않은 워커 장군의 공로

워커 장군
워커 장군 후손의 전쟁기념관 방문 / 출처 : 연합뉴스

이번 방문에는 워커 장군의 손자인 샘 워커 2세 부부와 증손녀, 고손자와 고손녀 등 3대가 함께 했다.

이들은 워커 장군의 활약상이 담긴 6.25 전쟁 전시실을 관람하고 워커 장군의 이름이 새겨진 전사자 명비에 헌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워커 장군의 손자인 샘 워커 2세는 이번 방문에서 “한국 국민들이 조부의 희생과 공헌을 기억해 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뒤이어 그는 “한국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며 세계 5대 경제 강국 중 하나로 성장했고 조부가 대한민국 자유 수호에 기여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낙동강 방어선 사수의 절대적 공로

워커 장군
워커와 맥아더 / 출처 : 연합뉴스

워커 장군의 대표적인 공로는 단연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해 인천 상륙 작전의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의 공세로 인해 낙동강 일대까지 방어선이 밀리자 미국 내부에서도 전쟁보다는 철수를 고려해야 한다는 일부 의견이 나올 정도로 전세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워커 장군은 ‘버티지 못하면 죽음'(Stand or Die)이라는 구호까지 내리며 낙동강 방어선 사수 의지를 드러냈으며 중장이었던 본인이 직접 항공기를 타고 적진을 정찰할 정도로 최일선에서 군을 지휘했다.

또한 당시 상당수의 병력은 맥아더 휘하에서 상륙 작전 준비에 투입되어 워커 장군은 제대로 된 지원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방어선을 사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워커 장군의 지휘 덕분에 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으며 그 사이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전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 낙동강 방어선이 왜 중요한가요?

낙동강 방어선은 6.25 전쟁 중 중요한 전략적 위치였습니다. 만약 이 방어선이 무너졌다면, 전쟁의 전세가 크게 불리해질 수 있었습니다.

  •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는 최후의 방어선이었습니다.
  •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교통사고로 허망한 최후 맞아

워커 장군
워커 장군 동상 / 출처 : 연합뉴스

이처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군을 지휘했던 워커 장군은 끝내 자신의 목숨마저 한국에 바쳤다.

1950년 12월 워커 장군은 전투 지휘소를 향해 차량으로 이동하던 도중 국군 측 화물차와 충돌했다. 사고 발생 직후 워커 장군은 인근 야전 치료소로 급히 후송되었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장군으로서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최후였다.

워커 장군
워커 부자 / 출처 : 연합뉴스

당시 사고 소식을 전해 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은 사고를 낸 국군 운전사를 사형시키려 했으나 미국 측 만류로 사형은 취소되기도 했으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아들 샘 워커 대위는 워커 장군의 시신을 수습한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전쟁에 임했다.

또한 워커 장군은 사후 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샘 워커는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장으로 진급해 미 육군 역사상 최초로 부자가 대장까지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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