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상륙작전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 정반대편 동해안에서 ‘미끼’가 되어야 했던 772명의 이름은 오래도록 지워져 있었다.
1950년 9월, 학도병 772명이 탄 상륙함 문산호가 부산항을 떠났다. 평균 나이 17세. 이들에게 떨어진 명령은 북한군의 거점인 동해안 영덕 장사리에 상륙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군의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이 벌어지기 직전, 북한군의 시선을 반대쪽으로 끌어야 하는 양동작전이었다.
‘작전명령 제174호’, 학도병을 언급한 유일한 공식 문건
이 작전의 존재를 증명하는 핵심 기록이 있다. 국가기록원이 복원해 공개한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1950년 9월 10일)’다. 당시 정일권 참모총장이 친필로 작성한 이 명령서에는 “육본 직할 유격대장은 예하 제1대대를 상륙 감행시켜 동대산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 제1군단의 작전을 유리케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군사편찬연구소는 이 문건을 두고 “당시 희생된 ‘학도병’을 의미하는 ‘유격대’를 언급한, 현재까지 확인된 유일한 공식 문건”이라고 평가했다. 수십 년간 참전용사들의 증언에만 의존하던 장사상륙작전의 실체가 공식 기록으로 뒷받침된 것이다.
2주 훈련, 소련제 장총, 미숫가루 몇 봉지

장사상륙작전의 주체인 육군본부 독립 제1유격대대는 1950년 8월 말 경남 밀양에서 이명흠 대위가 편성했다. 대원 대부분은 16~18세의 학도의용군으로, 상륙작전에 대한 지식이나 군사훈련이 전무했다.
이들이 받은 훈련은 고작 2주. 지급된 것은 소련제 장총, 위장용 북한군 군복, 그리고 식량인 미숫가루 몇 봉지가 전부였다. 3일치 물자만 보급받고, 교란 후 철수한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태풍 속 좌초, 그리고 6일간의 사투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한 문산호는 미 해군 구축함 엔디코트함의 호위를 받으며 15일 새벽 장사리 해안에 도착했다. 그러나 태풍이 몰고 온 거센 파도에 문산호가 좌초했다. 학도병들은 해변에 닿기도 전에 파도에 휩쓸리고 총탄에 쓰러졌다.
악전고투 끝에 오전 9시경 전 대대가 상륙에 성공했고, 북한군 제2군단의 주보급로인 7번 국도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상륙 12시간 만에 해변 인근 적 고지를 점령하고 반경 10km 내 북한군을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날 오전 6시, 서해안에서는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다. 장사리의 학도병들은 자신들이 ‘미끼’였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싸우고 있었다.
이들의 작전은 북한군 병력을 후방으로 차출하게 만들어 낙동강 전선의 총반격을 위한 여건을 조성했다. 하지만 17일부터 북한군이 전차와 2개 연대를 동원해 반격을 시작했고, 학도병들은 식량 부족과 통신 두절 속에서 고립된 채 버텨야 했다.
6일간의 전투 끝에 772명 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당했다. 행방불명자 다수. 19일 철수를 위해 도착한 조치원호마저 해안에 접근하지 못해, 30여 명의 학도병이 해변에 남겨진 채 철수가 이루어졌다.
47년간 잊혔던 작전
1997년, 수색 작업에 나선 해병대가 장사 앞바다에서 2,700톤급 전차상륙함 문산호를 발견했다. 장사상륙작전이 벌어지고 47년이 지나서야 이 작전의 물리적 증거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거대한 서사에 가려, 장사리에서 벌어진 6일간의 전투는 공식 전쟁사에서도 주변부에 머물렀다. 기록물이나 공식 문서보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의존해 전해져 왔고, 작전의 성과가 미미한 전투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전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의 기습 효과는 반감됐을 수 있다. 서해의 군산 양동작전과 동해의 장사상륙작전이 동시에 북한군의 판단을 흐려놓은 덕에, 인천의 본작전이 기습으로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번도 없이 싸웠고, 47년간 잊혀졌고, 공식 문건 한 장으로 겨우 존재가 증명된 772명. 인천상륙작전 75주년을 앞둔 지금, 그 ‘미끼’가 된 소년들의 이름을 다시 부를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