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생을 바쳐 일한 대가로 쌓이는 퇴직연금이 제자리걸음을 하며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노후를 위협하고 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할 자금이 금융권의 금고 안에서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셈이다.
500조 원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돈이 쌓여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물가 상승률조차 방어하기 버거운 심각한 ‘저수익의 늪’에 빠져 있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당정이 21년 만에 대대적인 수술대에 제도를 올렸다.
500조 원 시장의 씁쓸한 이면, 굳어진 쥐꼬리 수익률
현재 퇴직연금 시장의 현주소는 곪을 대로 곪아 있다. 최근 기준 전체 적립금 규모는 무려 496조 원을 돌파하며 외형적인 팽창을 이뤘다. 하지만 실속은 턱없이 부족하다.
원금이 보장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가입하는 상품조차 지난 10년 평균 수익률이 4.7%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참담한 성적표의 배경에는 기형적인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자산 운용의 효율성보다는 은행 등 판매 채널의 접근성에만 기대어 자금이 쏠리다 보니, 적극적인 투자보다는 안전 제일주의의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만 돈이 묶여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전체 적립금의 절반 이상을 은행권이 독식하며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만 누리는 혜택, 노후 자산 양극화의 민낯
수익률 못지않게 심각한 뇌관은 사업장 규모에 따른 극심한 혜택의 불균형이다. 300인 이상 대기업의 경우 92%가 넘는 압도적인 퇴직연금 도입률을 자랑한다.
반면 5인 미만의 영세 사업장은 그 비율이 10%대 초반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다. 전체 사업장을 기준으로 봐도 10곳 중 7곳 이상은 퇴직연금의 울타리 밖에 방치되어 있다.

이는 곧 일하는 곳의 덩치에 따라 노후 준비의 출발선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 그래도 팍팍한 영세 근로자들의 노후 자산 격차를 더욱 부추기는 치명적인 문제로 지적받아 왔다.
21년 만의 대수술, ‘기금형 연금’으로 돌파구 찾는다
상황이 이토록 심각해지자 당정은 모든 사업장에 퇴직연금 도입을 의무화하는 초강수를 두기로 합의했다. 이와 함께 흩어진 영세 사업장의 적립금을 하나로 뭉쳐 투자 전문가에게 굴리게 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전격 도입한다.
거대한 장기 자금이 펀드처럼 묶여 자본시장으로 흘러가면, 고질적인 저수익률 문제를 해결하고 영세 근로자들도 전문적인 자산 운용의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한 업계 관계자는 수십 년간 방치됐던 퇴직연금 제도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마침내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며, 장기 자금이 증시로 유입되는 긍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첩첩산중 남은 과제, 성공의 열쇠는 ‘디테일’

다만 이 원대한 청사진이 현실의 벽을 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다. 당장 제도를 강제로 의무화했을 때 하루하루가 고비인 영세 사업주들이 느낄 재무적 타격을 어떻게 덜어줄 것인지가 가장 큰 관건이다.
또한 제도를 끝내 도입하지 않는 얌체 사업장에 과태료를 물릴 것인지, 중도 인출은 어느 선까지 엄격하게 제한할 것인지 등 예민하고 복잡한 쟁점들이 여전히 합의문을 채우지 못한 채 남아있다.
정부는 실태조사를 토대로 영세 기업 맞춤형 지원·제재안을 연내 마련할 방침이다. 21년 만의 퇴직연금 개편 적기를 맞아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합리적인 대안이 절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