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세계대전 때 하루에 함선 한 척 이상을 찍어내던 나라가 이제는 1년에 상업 선박 한 척도 못 만든다. 그 미국이 한국 조선사 세 곳에 공식 문서를 보냈다.
미국이 이번에 보낸 건 ‘RFI(정보요청서)’다. 계약을 맺자는 제안이 아니라, “당신들이 이런 배를 만들 수 있느냐”고 먼저 역량을 물어보는 사전 타진 단계의 공식 문서다.
트럼프 취임 후 미국이 RFI 형식으로 한국 조선소에 함정 역량을 문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왜 지금, 이 방식으로, 이 세 곳인지—그 배경에 미국 조선업 붕괴의 민낯이 있다.
하루 한 척에서 연 한 척 미만으로
미국 조선업의 추락은 숫자로 보면 더 충격적이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 조선국이었다.
공장마다 함선이 쏟아져 나와 하루에 한 척 이상을 진수시켰다. 그 생산력이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현재 미국의 연간 상업 선박 건조량은 사실상 한 척 미만 수준으로 떨어졌다. 냉전 전성기와 비교하면 생산력이 수십 분의 일로 쪼그라든 것이다.
세계 최강 해군을 보유한 나라가 정작 군함을 자국에서 만들지 못하는 역설이다.
비용 격차는 또 다른 문제다. 미국 조선 비용은 한국 대비 3~4배 높다.
같은 사양의 함정을 한국에서 건조하면 그만큼 예산이 남는다. 게다가 미 해군은 20년치 정비 적체를 안고 있을 만큼 함정 유지·보수 능력도 한계에 달했다.
새 배를 못 만드는 데다 있는 배도 제대로 못 고친다. 이것이 미국이 한국에 문을 두드린 1차 배경이다.

트럼프의 러브콜, G7에서 RFI로
미국의 한국 조선업 구애는 갑작스럽지 않다. 2025년 12월 트럼프 대통령은 “한화는 좋은 회사”라며 미 해군 차세대 호위함 건조 협력 파트너로 한화를 직접 거명했다.
이후 2026년 4월 초 한화 방산 미국 법인과 삼성중공업이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 개념 설계 계약을 수주했다. 한국 기업이 미 해군 군함 신조 설계에 공식 참여한 첫 사례였다.
결정적 계기는 6월 16일 프랑스 에비앙레뱅 G7 정상회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미국 군함 10척을 빠르게 건조해줄 수 있느냐”고 직접 물었다.
정상 간 비공식 타진이 공식 절차로 이어지기까지는 3주도 걸리지 않았다. G7 직후 미 국방부와 미 해군이 각각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에 RFI를 발송한 것이다.
미 연방조달규정상 RFI는 정식 입찰 이전에 가격·인도 조건·시장 정보를 파악하는 법적 절차다. 계약 아닌 ‘탐색’이지만, 공식 문서가 오갔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규제 장벽과 삼각 우회 구조
이 협력이 실제 수주로 이어지려면 넘어야 할 벽이 있다. 현재 미국 함정의 해외 조선소 건조는 반스-톨레프슨 수정법에 의해 사실상 금지돼 있다.
미 국방부는 이 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준비하고, 2027년도 예산 반영을 위한 검토를 병행 중이다. 법 개정 없이는 한국 조선소가 직접 미 해군 함정을 건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국내 조선사들은 이미 선제 대응에 나섰다. 한화오션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뒤 전투함 건조 라이선스 취득 절차를 진행 중이다.
미국 본토 내 건조 거점을 확보해 반스-톨레프슨 규제를 우회하는 구조다. HD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각각 헌팅턴 잉걸스, 제너럴 다이내믹스 나스코와 협력 체계를 구축해 미국 파트너사를 앞세우는 방식을 택했다.
세 회사가 각기 다른 루트로 같은 문을 두드리고 있다.

지정학 리스크도 현실화됐다. 중국은 한화 방산 미국 법인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다만 1년 유예를 붙였다. 한국 조선업에 대한 지정학 리스크가 처음으로 구체적 형태를 띤 사례다.
나토 사무총장은 “한국 방산은 환상적”이라고 평가하며 유럽 군비 증강 과정에서도 한국 방산 협력을 언급했다. RFI 한 장이 불러온 파장이 미국을 넘어 유럽까지 번지고 있다.
첫 RFI가 쐐기를 박았다
RFI는 계약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 해군이 스스로 ‘우리는 못 만든다’고 공식 인정하며 한국에 역량을 물어본 것은 처음이다.
규제 개정 여부, 예산 반영 시점, 지정학 변수 등 변수는 남아 있다. 하지만 하루 한 척을 만들던 나라가 연 한 척도 못 만드는 나라가 된 순간,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이미 RFI 수신처 세 곳이 말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