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이역만리에서 숙주나물 팔아 ‘대박’ 터뜨린 한국인 청년, ‘그의 정체는 과연?!’

숙주나물 사업에서 시작해
국내 제약업계 부동의 ‘매출 1위’로 성장한
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젊은 시절이 재조명되다
숙주나물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유한양행을 세운 유일한 박사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재조명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1919년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뒤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다. 동양인이 회계사로 일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지만, 이곳에서 유일한 박사는 제대로 능력을 발휘했다.

회사에서는 유 박사를 신임하여 동양 판매 총책임자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유 박사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있는 조국과 민족의 수모를 떠올리면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제너럴일렉트릭을 떠나기로 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닦아 그 경제력을 가지고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숙주나물 재배 및 판매업이었다.

유일한 박사가 하필 ‘숙주나물’을 선택한 이유

숙주나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당시 미국에서는 중국식 만두에 대한 수요가 높았다. 유럽인들에게는 입맛을 돋워주는 ‘별미’로, 그곳에 거주 중인 중국인들에게는 귀중한 주식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었던 것이다.

숙주나물은 중국식 만두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재료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미국에는 녹두를 생산하고 재배하는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항상 공급이 부족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 박사는 철저한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숙주나물 재배 및 판매 사업을 시작했고,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소규모 가내공업으로 출발했던 사업은 어느새 기업의 형태로까지 확대되었다.

숙주나물
출처: 라초이

유 박사의 숙주나물 사업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의 ‘독특한 아이디어’가 큰 몫을 했다. 유 박사는 숙주나물을 유리병이 아닌 통조림에 담아서 판매했다.

유리병은 운반 과정에서 파손되기 쉬웠고, 오랫동안 신선도를 유지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유 박사는 이를 개선하여 통조림에 담은 숙주나물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미국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유 박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숙주나물 통조림과 중국 간장을 들고 미국 가정을 직접 방문하며 요리법을 설명하는 등 적극적으로 고객 확보에 나섰다. 그 노력의 결과로 유 박사의 사업은 나날이 번창해 나갔다.

이제 유 박사는 소규모 기업에서 벗어나 더 큰 기업을 설립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그는 대학 친구였던 월레스 스미스를 찾아갔다.

월레스는 평소 유 박사의 사업적 재능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시설 투자 자금을 요청하는 유 박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이렇게 해서 라초이 식품회사가 만들어졌다.

라초이 식품회사는 1922년에 세워졌으며, 이때 유 박사의 나이는 27세였다.

평생의 반려자 호미리 여사를 만나다

숙주나물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안정된 직장을 얻게 된 유 박사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의 친구였던 호미리 여사와 교제를 시작하였다.

호미리 여사는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유 박사와 같은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는 미시간 대학 졸업 후 코넬 대학으로 옮겨 의학 공부를 마친 뒤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는데, 동양인 여성으로서는 최초였다.

숙주나물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유 박사와 호미리 여사는 각자의 일에 열중하면서도 서로를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 그러다가 유 박사의 나이가 30세가 되었던 1925년에 마침내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호미리 여사는 유 박사에게 단순히 ‘배우자’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였다. 유 박사가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던 것도 호미리 여사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 박사가 ‘안티푸라민’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호미리 여사의 역할이 컸으며, 유한양행 창립 당시 약품을 대량으로 수입해 공급할 수 있었던 것도 호미리 여사가 의사이기 때문이었다.

유일한 박사의 ‘모범 납세’에 영향을 준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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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다시 19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한양행 설립 이전의 이야기를 살펴보겠다. 라초이 식품 회사의 숙주 판매 사업은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었고, 급기야는 미국 내에서 필요한 만큼의 녹두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을 정도였다.

유 박사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녹두를 수입하기로 결정한 뒤 21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이때 유 박사의 가치관을 형성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중국에서 녹두를 구매할 때 유 박사는 규모가 작고 허름한 곡물상 노인과 거래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끝내자 노인은 유 박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유 박사는 이 제안에 응했고, 곧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호텔 정문을 나서니 곡물상 노인이 보낸 롤스로이스 승용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노인의 집으로 간 유 박사는 궁전처럼 커다란 저택을 보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이때 유 박사는 중국의 기업 문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그 노인처럼 허름한 소매상으로 위장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때의 일을 계기로 유 박사는 기업인이라면 정당한 세금을 내야 하고, 그 세금으로 국가가 번영해야 기업 또한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세우게 된다. 훗날 그가 세운 유한양행은 모범납세업체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번창하고 있는 식품 회사를 정리하고 유한양행을 설립하다

숙주나물
출처: 온라인 커뮤니티

어쨌든 중국에서 할 일을 마친 유 박사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마주친 조국의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일제의 침탈도 가슴이 아팠지만 무엇보다 유 박사를 안타깝게 만든 것은 ‘열악한 보건 상태’였다.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고, 흔한 폐결핵조차 치료하지 못하는 상황이 파다했다.

조국의 비참한 광경을 목도한 유 박사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자신이 만든 미국 굴지의 식품 회사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그는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때 유 박사는 의사였던 호미리 여사뿐만이 아니라 또다른 조력자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세브란스 병원의 에비슨 박사였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보고 느낀 한국의 의료 실태를 유 박사에게 소상히 알려주었다.

숙주나물
출처: 유한양행

에비슨 박사는 유 박사에게 한국에는 의약품이 부족하므로 이를 수입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했고, 조국과 민족을 돕고 싶다는 마음만 있을 뿐 방법을 몰랐던 유 박사에게 그 조언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마음을 굳힌 유 박사는 미국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고국으로 다시 돌아와 제약 회사를 설립했다. 이것이 1926년의 일이며, 유한양행의 시작이었다.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최초로 CEO 제도를 실시한 기업이다. 또 대한민국 기업 중 최초로 전사원 주주제를 실시하여 유일한이 보유하고 있던 주식의 52%를 사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창립 100주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은 ‘바른 기업’의 표본으로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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