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들의 노후를 책임질 퇴직연금이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느리게 불어나는 구조에 갇혀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원금 손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 가입자의 대다수가 수익률이 가장 낮은 ‘안정형’ 상품에 노후 자금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원금 보장이 심리적으로는 편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노후 준비의 관점에서는 물가 상승률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가장 비싼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85%가 몰린 안정형…물가 빼면 ‘실질 수익 0’
최근 정부 당국이 공시한 2025년 말 기준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현황에 따르면, 전체 적립금 53조 3,000억 원 가운데 무려 45조 5,000억 원(85.4%)이 초저위험 등급인 안정형에 몰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입자 수로 따져도 전체 734만 명 중 79.2%가 안정형을 선택했다.
문제는 극심한 쏠림 현상이 전체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갉아먹고 있다는 점이다.
투자 유형별 지난 1년간의 수익률을 살펴보면, 적극투자형이 14.9%, 중립투자형이 10.8%로 두 자릿수 성과를 낸 반면, 대다수가 가입한 안정형은 고작 2.6%에 그쳤다. 적극투자형과 안정형이 함께 섞인 전체 평균 수익률이 3.7%에 머문 이유도 이 거대한 안정형 쏠림 탓이다.
안정형의 1년 수익률 2.6%는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2.1%)을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다.

여기에 세금과 운용 수수료 등을 빼고 나면, 사실상 내 퇴직연금의 실질 가치는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는 셈이다.
10년 뒤 시뮬레이션…최대 1억 3,000만 원 격차
수익률의 차이는 10년이라는 장기 복리의 마법을 거치면 체감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벌어진다.
만약 55세 근로자가 DC형 퇴직연금 적립금 5,000만 원을 은퇴 전 10년간 운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단, 지난 1년의 수익률이 향후 10년간 동일하게 이어진다는 단순 복리 가정)
연 2.6% 수익률의 안정형에 그대로 둔다면 10년 뒤 적립금은 약 6,463만 원으로 불어난다.

반면, 이를 연 10.8%의 중립투자형으로만 바꿔도 10년 뒤 약 1억 3,943만 원을 손에 쥘 수 있다. 원금은 같지만 약 7,480만 원의 차이가 발생한다.
더 나아가 연 14.9%의 적극투자형을 선택했다면 10년 뒤 예상 금액은 약 2억 53만 원으로 훌쩍 뛴다. 안정형에 방치했을 때와 비교하면 무려 1억 3,500만 원 이상의 기회비용 격차가 발생하는 구조다.
앱에서 3분이면 끝…방치가 가장 큰 리스크
금융권 관계자들은 디폴트옵션의 가장 큰 함정은 가입자가 제도를 잘 몰라 처음 설정된 가장 안전한 상품으로 자금이 알아서 흘러가도록 방치하는 데 있다고 입을 모은다.
물론 주식형 펀드 비중이 높은 적극투자형은 시장 상황에 따라 단기적인 원금 손실 리스크가 존재한다.
하지만 퇴직연금은 최소 10년 이상 장기로 굴리는 자금인 만큼, 물가 상승이라는 확실한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투자형 상품으로의 비중 확대가 필수적이다.
변경 방법도 복잡하지 않다. 본인이 가입한 금융사의 모바일 뱅킹 앱이나 퇴직연금 전용 앱에 접속해 ‘디폴트옵션 변경’ 메뉴를 선택하면, 자신의 투자 성향에 맞는 중립형이나 적극형 상품으로 3분 이내에 손쉽게 갈아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