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게 미국 정부발 압박이 또 날아들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향해 미국 내 메모리 반도체 생산 시설을 더 지으라고 공개 촉구한 것이다.
두 기업이 이미 수십조 원을 미국에 쏟아붓고 있는 와중에 나온 요구라, 업계 안팎에서 이 다음 수순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경쟁사 행사장에서 쏘아 올린 한마디

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클레이 타운. 마이크론이 건설 중인 반도체 공장의 첫 콘크리트 타설 기념식 현장에서 러트닉 장관은 뜻밖의 발언을 쏟아냈다.
행사의 주인공은 마이크론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태평양 건너 한국 기업들을 향하고 있었다. “마이크론이 앞장서고 있으니 경쟁자들은 질투심을 느낄 것이고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들이겠다고 공개 선언한 것이다.
마이크론 최고경영자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도 인정하면서 한 발언이었다.
이미 수십조 원을 쏟는 중인데

사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을 짓고 있고, 바이든 행정부 시절 미국 반도체법(칩스법) 보조금 지원도 받기로 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파예트에 인공지능(AI) 반도체용 첨단 패키징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패키징’이란 완성된 반도체 칩을 하나의 제품으로 조립·마감하는 공정으로,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생산의 핵심 단계다.
게다가 SK하이닉스는 10일 미국 나스닥에 ADR(미국주식예탁증서·해외 기업이 미국 증시에서 거래되도록 발행하는 증서)을 상장해 추가 자금을 조달할 계획까지 잡아뒀다. 미국 상무장관의 ‘더 짓자’ 발언은 공교롭게도 이 상장 하루 전날 터져 나왔다.
SK하이닉스를 겨누는 더 큰 구도

러트닉 장관의 발언은 단순한 구애가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임기 내 전 세계 반도체 생산의 일정 비율을 미국에서 담당한다는 목표를 공언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과 대만이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훔쳤다’는 인식을 공개적으로 밝혀온 터라, 한국 기업이 미국 투자 확대에 소극적일 경우 반도체 관련 품목에 관세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분석이 업계에서 나온다. 일본 니혼게이자이는 한국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상당 수준에 달한다며 트럼프 정부가 이를 규제하려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미국이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겨냥해 강제 시장 개방과 수출 제한을 포함한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했던 역사가 현재 한미 구도의 선례로 거론되는 이유다. TSMC도 같은 압박에 미국 투자를 대폭 늘리고 대관(對官) 활동을 강화하는 중이며, 이 방정식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결국 판은 이렇게 짜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러트닉 장관의 발언에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대응 전략을 고심하는 분위기다. 마이크론은 이번 행사에서 2035년까지 미국 내 투자 규모를 대폭 늘리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수치는 당초 계획에서 두 차례 상향된 결과다.
마이크론이 투자 규모를 계속 높여 잡을수록, 한국 기업을 향한 ‘너희도 해라’는 압박의 기준점도 함께 올라가는 구조다. 결국 이 상황의 진짜 의미는, 미국이 단순히 반도체 생산 시설을 원하는 게 아니라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주도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핵심 역량을 미국 땅 위로 끌어오려는 구조적 압박을 본격화했다는 것이다.
투자 규모를 앞세운 마이크론의 질주가 한국 기업들의 미국행 시계를 강제로 당기는 레이스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