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금이 급한 서민을 겨냥한 불법 대출 사기가 한층 정교해졌다. 이번엔 휴대폰 렌탈 계약이 도구로 쓰였다.
실제로 단말기는 받지도 못한 채 서류에만 서명했는데, 그 계약서가 연 150%가 넘는 고금리 대출의 담보가 됐다.
금융감독원이 20일 소비자경보 ‘주의’를 발령하며 공개한 사례는, 수법이 얼마나 치밀하게 법망을 비껴가도록 설계됐는지를 보여준다.
배달대행업 사장이 된 적도 없는데
40대 직장인 박모씨는 지인 소개로 찾아온 업자의 말을 믿었다. 사업자등록만 하면 저금리로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얘기였다.

배달대행업 사업자 명의를 내고 나니, 업자는 곧바로 휴대폰 렌탈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단말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인도받았다’는 확인서에 서명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류가 대출 담보가 됐고, 이자는 법정 최고금리를 훌쩍 넘는 연 150% 이상이었다.
금융감독원이 이번에 공개한 사례는 이 구조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설계됐는지를 보여준다. 불법사금융업자는 처음부터 휴대폰 렌탈업체와 짜고 움직였다.
개인보다 사업자가 더 많은 대수를 렌탈할 수 있다는 점을 노려 피해자에게 배달대행업 등 사업자등록을 유도했다.
실제 단말기나 유심은 제공하지 않고 설치확인서에만 서명하게 해 정상 거래처럼 꾸몄다.
대출 계약이 아니라 렌탈 계약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불법업자는 나중에 ‘자신은 렌탈 업무만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대부업법 적용 자체를 피해가는 치밀함도 보였다.
서류 한 장에 담긴 덫

피해 규모는 작지 않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렌탈 채권이 제3의 추심업체에 넘어가고, 거기서부터는 강도 높은 추심이 시작됐다.
허위 렌탈 계약은 ‘단말기를 받았다’는 서명이 남아 있어 연체 시 형사고소 협박 수단으로도 쓰였다. 위약금과 렌탈료 추가 납부 요구가 뒤따르는 이차 피해까지 더해졌다.
금감원은 2026년 동일 업자와 관련한 불법사금융 민원·제보 8건, 유사수신 제보 15건을 수사 의뢰했고, 경기남부경찰청·서울영등포경찰서와 협업해 범죄 혐의를 확인했다.
이 수법과 함께 금감원이 주목한 또 다른 사기가 이심(eSIM) 투자였다. eSIM은 스마트폰에 내장된 디지털 유심으로, 별도 칩 없이 통신사를 바꿀 수 있는 기술이다.
사기 일당은 여행객·외국인을 대상으로 eSIM을 판매하는 사업에 참여하면 월 수십만 원 이상의 수익과 원금 보장이 된다고 약속했다.

허위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어 투자자에게 가상 점포를 할당하고, 유튜브와 SNS에 인공지능 홍보 영상과 조작된 수익 후기를 반복 게시해 합법 사업처럼 포장했다.
투자금을 더 넣거나 하위 판매자를 모집하면 등급을 올려주는 다단계 구조도 끼어 있었다. 결말은 판에 박혔다.
피해자가 돈을 돌려달라고 하면 세금 명목으로 추가 입금을 요구하다 홈페이지를 닫고 잠적했다.
금감원이 ‘경보’를 누른 이유

금감원은 이 eSIM 투자를 전형적인 폰지 사기로 규정했다. 폰지 사기란 실제 수익은 없으면서 새로 들어오는 투자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수익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초기에 소액 수익을 실제로 지급해 신뢰를 쌓고, 이후 더 큰 금액을 끌어들이다 사라지는 수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6년 3월에는 중동 정세 불안을 이용해 수소에너지·드론 투자를 가장한 유사수신이, 2월에는 풍수·사주 콘텐츠로 접근한 뒤 가짜 주식 거래 앱을 설치하게 하는 사기가 잇달아 적발됐다.
2025년 금감원에 접수된 유사수신 민원·제보는 295건으로 전년 410건보다 줄었지만, 실제 혐의가 확인된 26개 업체가 경찰에 넘겨졌다.
결국 이번 소비자경보의 진짜 의미는, 사기의 껍데기가 휴대폰 렌탈이든 eSIM이든 부동산이든 신기술이든 내부 구조는 항상 같다는 것이다.
원금 보장과 월 단위 고수익을 동시에 약속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기의 신호다. 피해자 대부분은 서류에 서명하고 나서야 그것이 덫이었음을 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