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경제계 수장이 제주에서 이례적인 선언을 내놨다.
한경협(한국경제인협회) 류진 회장이 “2026년은 인류 문명이 AI 시대로 접어든 원년”이라고 못 박은 것인데, 분위기는 축제가 아니었다.
반도체를 빼면 제조업 생산이 사실상 멈춰 있고, 서비스 수출 증가율은 미국·중국 같은 주요국에도 크게 못 미친다는 불편한 숫자가 곧장 뒤따라 나왔다.
135년의 데자뷔
15일 제주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경협 제주하계포럼 개막식. 류진 회장은 뜬금없이 교황 이야기를 꺼냈다.
135년 전 산업혁명기,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을 통해 ‘새로운 산업사회가 시작됐다’고 선포했다. 공장이 농촌을 집어삼키고, 노동의 풍경이 통째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류 회장이 꺼낸 두 번째 카드는 2026년 5월, 교황 레오 14세가 ‘인류 문명이 AI 시대로 접어들었다’며 AI가 인간 존엄성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선언이었다.
두 선언 사이의 간격이 정확히 135년이다. 류 회장이 이 대비를 꺼낸 이유는 분명했다.
AI는 단순한 기술 도구가 아니라 문명의 기반 환경이 바뀐 사건이라는 것이다.
10년 전 알파고, 지금의 AI 원년
류 회장은 시계를 2016년으로 돌렸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그 시점을 AI가 세계 무대에 처음 등장한 순간으로 짚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6년을 실질적인 AI 원년으로 규정한 것이다.
“과거 50년이 ‘잘 만드는 대한민국’의 시대였다면, AI 시대에는 ‘혁신 잘하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 독일 BMW 공장에 AI 로봇이 조립 라인에 들어섰고, 미국 아마존은 AI 예측 배송을 이미 실행 중이다.
한경협이 이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꺼낸 건 선언이 아니라 경고다. 한국 제조업이 이 변화에 올라타지 못하면 시간이 없다는 메시지였다.
‘혁신’이 막히는 곳
문제는 바로 여기서 불거진다.
한경협이 이번 포럼에서 들고나온 ‘뉴 K-인더스트리’ 전략은 AI 전환(AX)·녹색 전환(GX)·서비스 혁신(SX)·제도·인프라 혁신(IX) 네 축으로 짜여 있다.
문승욱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방향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 전략을 실제로 굴리려면 현장에서 AI를 다루고, 설계하고, 적용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기업 규모별 AI 기여율 데이터는 이 대목에서 찬물을 끼얹는다.
종사자 10인 미만의 소기업에서 AI 도입이 극히 저조하다는 수치가 나왔고, 실제로 전체 산업에서 10인 미만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으로 크다.
한국 경제의 허리를 떠받치는 수많은 중소 사업장에는 AI를 들여올 사람도, 쓸 사람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한경협이 던진 질문
결국 이 포럼에서 류 회장이 던진 질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특허 출원 건수나 AI 투자 규모만 보면 한국은 상위권이다.
그러나 기술이 실제 현장에서 매출로 연결되는 고리, 즉 혁신을 굴릴 인재와 조직 문화가 빠져 있다.
KAIST 최재식 교수가 개막 강연에서 “기술 도입만으론 부족하고 조직 문화·인재 전략·데이터 활용 역량까지 함께 혁신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경협이 AI 원년을 선언한 2026년, 한국 기업들이 실질적으로 마주한 과제는 기술보다 사람이다.
번듯한 청사진보다 그것을 실행할 인재 생태계를 먼저 갖추지 않으면, 135년 전처럼 문명의 전환을 옆에서 구경하는 쪽이 될 수 있다.
